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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24
제목 내적 치유(Inner Healing)의 모순

내적치유(Inner Healing)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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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치유를 교회에 도입한 장본인은 Carl Gustav Jung의 제자 Agnes Sanford였고 그 다음에는 Jimmy Carter 대통령의 죽은 누이 동생인 Ruth Carter Stapleton이었다. 그 후에는 Stapleton을 따랐던 John and Paula Sanford, Dennis and Rita Bennett, Michael Scanlan들이다. 로마천주교인으로서는 Linn 형제와, 예수회 신부들인 DennisMatthew, 그리고 로마천주교 신부였던 Francis MacNutt였다.

 

Francis MacNutt는 지금은 결혼을 하고 성공회와 천주교들을 다니면서 치유세미나를 하고 있다. 이들중 Stapleton Sanford들과 MacNutt는 모두 Agnes Sanford에게서 내적 치유를 직접 배웠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을 통해서 전에는 심리학과 정신과학과 새시대(New Age) 사람들만 하던 내적 치유가 기독교회에도 들어오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내적 치유를 퇴행(regression)”, 심상법(visualization), 유도 심상법(guided imagery), 꿈의 분석과 게슈탈트(gestalt: 원시적 비명, 감정의 표출, 역할 대행 등) 치료법만 다루려고 한다. 내적 치료자들은 이런 기법의 하나 혹은 전부를 사용한다.

 

인간의 영혼을 돌보는 사역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건전한 정서를 갖기 원하시며, 분이나 시기 질투와 같은 파괴적인 정서는 이를 버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를 맺기 원하신다. 그래서 참다운 내적 치유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개개인의 형편에 맞게 행하시는 사역이다.

그러나 심리학에서 상용하는 내적 치유는 성경에서 말하는 상담이나 권고나 권면이나 훈계 등의 성경적 사역과는 다르다. 내적 치유란 말이 비교적 최근에 나온 말이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상담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역을 내적 사역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어 더욱 혼돈을 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또 정서적 건강과 영적 건강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서적 건강은 성화의 과정으로 이루어지며 또 동시에 심리적 기법으로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영적 건강은 예수님을 믿어 나의 구주로 마음에 영접하는 결과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영을 다시 살게 하시기 때문에 얻는 결과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적 치유가 필요 없고 때때로 정서적 치료가 필요할 뿐이고 이로서 성화를 이룬다.

 

불신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그를 구주로 영접해야만 영적인 생명과 영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교회가 이것을 분명히 해주어야 한다. 심리적 기법은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도 영적인 생명을 줄 수는 없다. 따라서 내적 치유란 말은 성경적 상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내적 치유의 기본적 전제는 사람들은 누구나 살면서 부정적인 경험을 하기 때문에 정서적 상처를 받는 다는 것이다. 뿌리가 깊어 식별하기 힘든 상처는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이성이 발달하는 6세 까지 사이에 받는 상처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처는 무의식 세계에 숨어 있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특별한 이유 없이 자기가 원치 않은 행동을 하게 하거나 원치 않는 느낌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내적 치유는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자기에게 심리적 상처를 준 그 순간들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는 것이다. 어떤 내적치유자들은 전생까지 기억을 더듬어 전생에 받았던 상처까지도 다룬다고 주장한다. 이런 고통을 완화시키기고 치유를 하기 위해 화자들에게 퇴행(regression)”과 심상법(visualization)과 유도 심상법(guided imagery) 등의 기법을 사용하며 또 이것을 혼자 해 보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내적치유자들은 사람이 겉으로는 정서문제를 들어내지 않아도 또 상처를 받은 것을 생각해 내지 못해도 사람은 누구나 내적 치유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한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누구나 상처를 받는데 심한 경우에는 아동학대를 받기도 하고 또 자기도 모르는 난산의 고통 때문에 받은 상처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대소간의 불쾌한 경험을 하고 살기 때문에 항상 끊임없이 내적 치유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완전한 복을 줄 수 없는 세상에서 완전한 복을 찾는 자의식적이고 쇠약한 사람들이 생긴다.

 

내적 치유를 한다는 기독교인들은 내적 치유는 성령님과 예수님을 돕는다고 한다. 내적 치유는 성령님이 역사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얼마나 잘못된 말인가? 첫째로 성령님은 심리적 기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이나 그의 제자들이나 또 구약의 선지자들이 인간의 심리적 구성을 알고 있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그 분들이 내적 치유 같은 임상심리학의 기법을 사용한 증거는 전혀 없다. 둘째로 내적 치유는 성령님의 임재에서 오는 능력을 사람의 육신적 상상으로 얻어 이를 대치하려고 한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창세기에서도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하셨다.

넷째로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님을 이용하려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부름을 해주시기 위해서 성령님으로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우리가 사는 목적이 성령님께 씀임받기 위해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상한 심령으로 겸손하게 나아가야 한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으려면 내가 좋아졌다는 망상을 갖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 대신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곧, 자기 욕심을 가지고 나가게 된다.

 

기독교 내적치유자들은 교회에서 내적 치유를 하게 되면 성령님과 예수님을 촉매 역할을 하는 상담자로 사용해서 치료가 가능해진다고 하며 내적 치유를 정당화하려 한다. 우리 속의 참된 평강은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게 드릴 때 생긴다. 어떤 일이 있던지 하나님께서 완전히 나를 주장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때 우리 속에 충만한 평강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또 기독교 내적치유자들이 내적 치유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다른 이유는 사람들이 용서를 못하는 이유가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내적 치유는 환자들에게 자기가 과거에 받은 상처를 다시 경험하게 해서 환자로 하여금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기를 임신 중에 어머니가 아버지와 다투어서 내가 상처를 받았으니 그 어머니를 용서해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잘못이 나타나면 하나님도 용서해야 한다고 한다.

 

용서가 정서적 건강에 꼭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기독교 내적 치유자들은 한 거름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도 하나님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기분을 돋구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용서하는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고 또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 즉, 우리의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주장하실 때에만 가능하다.

 

이들은 내적 치유를 받게 되면 하나님과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성경도 더욱 읽고 싶어지기 때문에 내적 치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내적 치유를 받는 사람이 이러한 기분이 생기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기분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알리는 표시판이 될 수 없다. 많은 이단자들과 새시대 종파 사람들이 기독교인들 보다 성경을 얼마나 열심히 읽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느낌만 가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종교적 망상일 수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의식 상태를 변화시키는 영적인 연습만을 해도 경험할 수 있다. 이단자들도 자기들의 생각으로 만든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에 대해 간절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묵상을 끝낸 동방 신비주의자들의 얼굴을 보면 기쁨이 충만한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충만해 있는가? 사실 새시대(New Age)의 철학의 전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으로 완전한 통일과 조화를 이룬다고 믿는다.

 

내적치유자들은 인류를 자연 및 우주의 마음(Universal Mind)”과 통합시키고 조화시킬 목적으로 내적 치유 방법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러나 내적 치유는 성경적 상담을 대치하려고 만든 새시대의 대용물이며 성도들을 성화시키려는 성령님의 역사를 모방하려는 사탄의 역사이다.

 

참 사랑과 용서는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를 고려하지 않고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본을 보여 주셨다. 우리의 죄 뿐 아니라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의 죄도 용서해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하셨다.

 

1) 심상법 (visualization)과 유도 심상법 (guided imagery)

 

내적 치유에서 사용되는 두 가지 중요한 묵상기법은 심상법(visualization)과 유도 심상법(guided imagery)이다. 심상법에서는 내적 치유를 받는 사람이 자기에게 상처를 준 환경과 다시 대면한다(confront). 그리고 영적 가이드(신자들의 경우에는 예수님)가 그 장면에 나타나서 자기와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을 상상해 본다.

 

유도 심상법에서는 상처를 준 장면을 다른 장면으로 바꾸어 상상하게 한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기를 학대했었다면 부모가 학대한 것을 상상하지 않고 부모가 자기에게 완구를 갖다주고 자기하고 노는 것을 상상하라고 한다. 사실은 잔인하고 사랑이 없었던 부모에게서 사랑을 유발시키거나 혹은 그 부모에게 사랑을 보이게 하려는 기법이다.

 

이런 것은 심상법과 유도 심상법이 사용되는 간단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심상법과 유도 심상법의 목적은 환자의 생각 속에 있는 현실을 바꾸어 보자는 것이다. 상처를 받았던 그 환경을 바꾸어서 환자로 하여금 부정적인 경험과 관련된 심리적 상처를 극복해 보자는 것이다. 이런 묵상기법이 환자들의 기분을 좋게 할 수는 있어도 정서적 상처를 다루는 성경적 방법은 아니다. 이런 기법은 심리학에서 나온 것이다.

 

상상의 창조력에 대한 Jung의 이론이 내적 치유의 기법에 주된 역할을 하고 있다. Jung의 이론은 생각은 물체로 변화될 수 있고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이것은 정신(mind)과 물체 matter)는 같은 것이며 따라서 과거나 미래도 상상력을 사용해 내가 원하는 생각의 전파를 우주적 창조 의식으로 보내면 과거나 미래도 영향을 받는다는 이론이다.

 

내적치유자들은 심상법(visualization)과 유도 심상법(guided imagery)이 우리에게 해를 주지 않는다면서 이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이는 기도할 때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상과 내적 치유에서 말하는 상상과는 천지의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일반적인 상상은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나 내적 치유의 경우에는 영적 가이드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상상을 발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속에서 말하는 신접과 유사한 것이다.

 

기독교 내적치유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이를 부인한다. 예수님이 그 현장에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계시다는 현실성을 갖게 하도록 돕는 것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어떤 설명을 하던지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환자가 예수님을 정말 보았다 해도 상상으로 보고 예수님을 정말 보았다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고, 예수님이 실제로 계시지 않았다면 이 상상법은 정신과학의 일종에 불과 하게 된다.

 

또 잘못되면 영계의 악영과 접하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지극히 위험하고 비 성경적인 일이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는 예수님을 만난다고 할 수 없다. 정말 어떤 실존을 보았다면 그것이 귀신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것을 경계하라고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5)

 

마법사나 박수들은 심상법(visualization)과 유도 심상법(guided imagery)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고, 또 지식을 얻으며, 병을 고치기 위해 영계와 접촉하는데 가장 강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성경에는 이러한 가르침은 없다. 이들은 마술적 기법에 불과하다. 심상법은 수 천년간 해오던 무속에 근거한 방법이다. 이런 것을 일반 사회와 교회가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심상을 통해서 병도 고치고, 부도 얻고, 현실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생각지 않고 많은 신자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런 기법을 가르치고 배우고 행하고 있는 것이다.

 

심상법(visualization)과 유도 심상법(guided imagery)은 우리의 정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성경적 방법이 아니다. 이는 다른 사람의 죄를 해결해 보려는 인간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 작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치유법을 인간의 방법으로 대치해 보려는 인간이 만든 방법이며 인간의 죄를 가리려는 앞치마에 불과하다.

 

내적 치유는 내가 원하는 것을 현실화하려는 게스탈트의 치료법도 된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의식을 변화시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케 하려는 것이다. 이런 이론은 Frederick S. Perls, Abraham Maslow, Carl Rogers, Sidney Berne 등이 제창한 이론들로 우리는 항상 이것들을 경계해야 한다.

 

2) 게스탈트 치료법(Gestalt Therapy)

 

 게스탈트 치료법은 1940F. Pearls에 의해 개발되어 속한 시간에 매우 인기 있는 치료법으로 발전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인기를 끈 것은 통찰력과 인식에 방향을 맞추었던 전통적인 치료법에 대한 대안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게스탈트 치료법의 목적은 환자에게 자기의 속과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더욱 잘 인식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라고 한다. Pearls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은 사람들이 이러한 인식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치료법은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만 붙들리지 않고 여기와 현재(here and now)에 더 많은 초점을 둠으로 인식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스탈트 치료법은 세가지 체계에 뿌리를 박고 있다. 1)심리분석적 심리학과, 2)게스탈트 심리학과, 3)실존주의이다. 실제의 치료법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치료에 사용되는 표출(ventilation)과 역할대행(role plays)과 여러 가지 게임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표출법(ventilation)을 통해서 환자는 숨을 크게 쉬는 연습을 한다. 숨을 깊이 쉬면서 의식 상태를 바꾸어 순간적으로 긴장을 풀고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고 한다. 게스탈트의 치료법에는 원시적 치료법(primal therapy)이 있는데 이는 원시적 비명법(primal scream)과 배게나 벽을 치는 것과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욕을 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들을 말한다.

 

비명 치료법(Scream Therapy)을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이것은 Arthur Janov가 만든 원시적 비명(Primal Scream) 치료법이다. Janov17년간 일반적 심리치료를 했었다. 그러다가 무의식적으로 행동을 결정하게 하는 결정요소들(determinants)이 있다는 이론과, 유년기의 생활이 현재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이론과, 무의식 속에 묻어버린 어릴 때의 충격들을 알려면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정신분석의 기본적 개념에다 자기의 독특한 이론을 합쳐 원시적 비명치료법을 만들었다. 원시적 비명치료법은 의식세계에서 무엇을 억제하든지 제거할 때 심리적 질병이 생긴다는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모든 심리치료에는 심리분석의 누룩이 들어 있지만 원시적 비명은 유난히 Freud의 냄새가 많이 난다. 그러나 JanovFreud의 틀을 교묘하게 왜곡했다. 그리고 Freud에게서 기본적인 것을 취해 그 속에 흥분제를 넣고, 그것을 하나의 연극으로 만들어 환자들을 자극시켜 격한 표현을 하도록 만들었다. Janov는 이런 왜곡된 방법으로 결국 과거로 돌아가는 개념을 보급시켰으며 95%의 치유 효과율을 자랑했다.

 

Janov1960Claremont Graduate School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개업을 했다. 그는 Danny Wilson이라는 학생을 데리고 비명 치료법을 시작했다. 치료중 JanovWilson에게 한 희극 배우가 기저귀를 차고 입에는 우유 병을 물고 엄마! 아빠!” 하고 부르면서 무대에서 다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희극 배우는 또 플라스틱으로 만든 자루에 토하기도 했었다. Wilson이 이에 현혹되는 것을 보고는 Janov가 그에게 희극 배우와 같이 엄마! 아빠!” 하면서 외쳐보라고 했다.

 

Wilson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나중에는 시키는데로 엄마! 아빠! 엄마! 아빠!” 하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Wilson은 당황해 하면서 몸을 틀고, 또 몸을 돌리면서 숨이 가빠지고 숨을 잘 쉬질 못했다. 그러면서 그는 쇳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엄마! 아빠! 엄마! 아빠!” 그는 경련과 발작도 일으켰다. 그리고 날카로운 죽음의 비명을 질렀다. Janov는 이 비명에서 원시적 비명 치료법을 만들었다. 그는 1970년에 원시적 비명이라는 책을 쓰고 20만 부 이상을 팔았다. Janov는 환자도 치료하고 치료자들을 훈련할 목적으로 Los AngelesPrimal Institute라는 학교까지 세웠었다. 그리고 원시적 비명치료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그는 New York에도 학교를 세웠다.

 

원시적 비명치료법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원시적 고통”(Primal Pain)이라는 말이다. Janov에 의하면 어린아이가 자라면서 자기 자신이 되려는 것과 그의 부모의 기대에 따라야 한다는 것 사이에서 궁지에 몰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기에 어린아이는 배가 고플 때에 배를 채워야 하는 욕구와, 용변후 갈아주어야 하는 욕구와, 주의가 필요시 주의를 받아야 하는 욕구 등이 충족되지 못하면 그로 인한 고통이 쌓이게 된다는 것이다.

 

원시적 고통은 자기의 욕구와 부모의 기대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 생긴다는 것이다. 자라면서 이런 갈등이 계속되면 원시적 고통이 누적되는데 Janov는 이것을 원시적 고통의 웅덩이”(Primal Pool of Pain)라고 했다. 이 웅덩이가 차서 넘치게 되면 신경증(노이로제 - neurosis) 환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때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이 되려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의 감정을 봉해버리고 비현실적 자기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Janov는 이와 같은 자기의 감정과의 분리를 신경증(노이로제)이라고 불렀다.

 

Janov원시적 장면(Primal Scene)”5-7세 사이에 생겨서 무의식 속에 숨겨진다고 했다. 그리고 고통이 있다는 것을 무시하려는 방어체제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그는 고통의 근원을 감추고 고통 때문에 생긴 긴장을 없애려는 생활 방식을 발전시키지만 그것을 없앨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도 Freud와 같이 과거로 돌아가 부모를 비난하고 과거에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과거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현재의 불안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Janov는 신경증의 원인은 오직 하나 뿐이며 그것은 봉쇄된 고통이라고 했다. 또 여기에 대한 치료도 오직 하나 뿐인 원시적 치료법(primal therapy)이라는 것이다.

 

Leonard Berkowitz는 폭행과 공격적 행위에 대한 전문가이지만 사람의 공격적 감정은 발산해 버리는 것이 좋다고 하는 이론을 찬성하지 않았다. Berkowitz 박사는 원시적 비명치료법은 공격적 행동을 조장하고 부추기기 때문에 계속해서 연쇄적인 폭행을 낳는다고 했다. 그는 공격적 행동을 취하라고 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아무리 선의로 한다 해도 치료를 받을 때 외에는 공격적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런 심리치료법은 수 백 수 천개로 변장하고 변모된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미혹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심리학의 인기에 눌려 성령님의 임재만으로는 우리에게 정서적 안정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심리학이 정서적 문제를 더 잘 다루기 때문에 심리학이 도우면 성령님도 더 빨리 또 더 잘 인간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교회가 전적으로 나서서 이런 심리적 치료를 두둔하고 있음을 잘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종교를 피해 도망해 다니다가 공백을 느끼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고 인간들이 만든 거짓 신들을 쫓아간다. 인간들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인간들을 바라보며 자기들의 공백을 채워달라고 한다. Robert Ornstein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는 역사상 가장 교육을 많이 받고, 가장 돈도 많고, 가장 정서적 자각을 잘 하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무식하다고 말했다.

 

새로운 영적 가르침이 나오면 언제나 그의 신학적 배경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신학은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게 하고 영적 건강을 해치게 한다. 일시적 유익을 주는 것 가지고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에 정 반대되는 것은 언제나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여기서 심리치료자들의 동기를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 동기는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은 그들의 가르침과 그들의 행함들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떻게 죽이던 관계없이 살인이다. 우리는 영적 문제에 있어서는 결과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또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고 하셨다. 왜 교회가 메말라 있는가? 왜 교회가 심리학의 이런 네 가지 오염된 물에 엄몰되어 숨을 못 쉬고 허덕이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며, 그것을 믿으며, 그 말씀을 먹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음식은 보는 것만으로는 배부르지 않고 우리의 육체에 영양과 힘을 주지 않는다. 설교도 듣는 것만으로, 또 성경도 보는 것만으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 말씀은 먹고 순종해야 우리에게 생명이 된다.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전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

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벧후 1: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7:24-27).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1:22)

 

성경적 해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요구한 것은 그들의 욕구나 느낌에 상관없이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라는 것이었다(3:3). 하나님의 요구는 간단했다. 그러나 그들은 마귀의 꼬임대로 잘못된 자기만족, 자기실현을 위해 불순종의 죄를 지어 그 결과로 자기에게 초점을 두게 되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르게 되고 하나님과의 특권적 관계를 잃어 그 죄가 오늘까지 모든 인류에게 내려와 삶의 문제들이 생기게 되었다(3:1-7; 3:16-24).

 

이것이 자기(self)"에게 초점을 두라는 이 세상과 심리이설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인간은 누구나 하게 태어났으며 이것을 믿어야 나의 삶이 성취된다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삶의 성취는 좋은 자화상이나 높은 자존심에 달려 있지 않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이 죄의 결과로 갖게 된 자기(self)”의 문제에 대해 내가 어떤 반응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자기(self)"에게 초점을 두게 됨으로 생긴 자기(self)"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항상 성경적으로 반응하고 자기를 항상 부인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9:23-24; 2:1-9). 예수님과 동행하려면 자기(self)”에게 초점을 두지 말고 자기(self)"를 부인하고(9:23-24) 그리스도가 없는 자기가치,” “자기확신,” “자기사랑,” “자기주장,” “자기신뢰,” “자기존중,” “자기 의,” “자기찬양등의 잘못된 삶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종이 되어(20:26-28) 모든 일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고후 5:9)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5:16; 벧전 2:12).

 

주님이 주신 최고의 계명은 자기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22:37-39). 구약의 율법과 선지서가 여기에 매어 달려있다(강령)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즉 이 말씀에 순종할 때 그리스도의 존심을 나에게 주신다. 사랑은 주는 것이고(3:16) 사랑은 행하는 것이고 사랑은 순종하는 것이다. 사랑은 자신보다 하나님과 이웃에게 하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타고났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하게 된다. 무서워 밖에 나가지 못하는 공포증도 자기 사랑의 결과이고 가족들도 아랑 곳 없이 고통을 피하려고 자살하는 것도 자기 사랑이다(딤후 3:1-2).

 

현대 교회는 힘을 다해 교인들에게 좋은 느낌을 넣어주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 하나님에 대한 죄와 반항에서 옴을 무시해 버리려고 한다. 교인들의 자존심에 큰 손상을 주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강단에서나, 책으로나, 또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자기주장을 하고 자존심을 높이라고 가르치며 언제나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를 용서하며 긍정적인 고백을 하고 무엇이나 좋게 느끼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이와는 정 반대이다. 인간은 원래 죄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 때문이기에 우리가 마음을 다해 우리에게 주신 복음에 순종하면 우리는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이다(6:17).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의 자존심을 높여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오시지 않으셨다. 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인간을 구하러 오셨다. 그런데 이제 인간은 죄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한다. 그래서 이제는 죄 때문에 심판 받고 지옥에 간다는 말을 교회에서도 듣기가 힘들고 대신 고통치유책임전가만을 강조한다. 이것이 잘못된 내적치유의 핵심신학이다.

 

성경에는 자존심에 관한 복음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이것은 분명한 인간의 길이다. 바울은 빌 2장에서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 . .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하면서 우리도 이와 같은 주님을 본받으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 사랑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다(18:4; 4:10). 하나님이 쓰시는 지도자들은 자존심을 높이는 훈련을 통해서 양성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종을 택하실 때 자존심이 높은 자들을 택하지 않으셨다.

 

모세가 바로의 왕궁에서 스스로 자기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원자라고 생각하자 하나님은 그를 미디안 광야로 보내신 후 광야의 어려움 속에서 자기를 포기하고 낮추시게 한 후 그를 세우셨다. 하나님이 기드온을 부르실 때에도(6) 그에게 자존심을 높이는 훈련을 시키시지 않고 그가 미디안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숨어서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을 때 오셔서 그를 위로하시고 세우셨다.

 

이사야도 하나님 앞에서 “. . .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하자 그를 세우셨다. 예레미아도 하나님 앞에서 그를 낮출 때(1:6) 그를 세우셨다. 삼손도 불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그가 하나님만 의지하자 비로서 죽기 전 이라도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었다. 다윗 왕도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데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하며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만을 높였다. 솔로몬은 왕이 되었을 때 자기가 자존심이 높아서 왕이 됐다고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에게 자기는 어린아이와 같아 일을 할 줄 모르니 백성을 다스릴 마음을 주시고 선악을 판단할 마음을 주시라고 자기를 낮출 때 하나님은 그를 세우셨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이름을 사울(큰 자)에서 바울(작은 자)로 바꾸고 주님에게 쓰임을 받을 수록 자기는 죄인의 괴수라 하였으며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는 고백을 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를 낮추고 죽여야 한다. 그러나 현대 교회가 심리학의 잘못된 이론들을 도입해 교인들에게 자존심을 높이라고 가르치니 교인들의 영이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목회자들이 심리학의 영향을 받으면 전하는 말씀에서 그만큼 복음은 없어지고 교인들의 심령은 메마르게 된다.

 

우리에게 영원한 변화와 생명을 주려는 성경적상담(목회사역)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인간의 방법이란 Freud, Sullivan, Erikson, Adler, Jung 등의 심리역학(psychodynamic)의 방법과 B.F. Skinner가 대표하는 행동주의의 방법과 Carl Rogers, Victor Frankl 등이 대표하는 실존주의 방법과 Occar Ichazo 등이 대표하는 심령주의 방법이다

 

 이런 심리이설들이 우리의 신앙의 초석을 흔들어 놓으면 안된다.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17:10-12) 같이 모든 것을 말씀에 비추어 보고 성경의 진리와 세상의 비진리를 아래와 같이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자료제공:  성경적상담자협회(KABC) 070-7565-3535

               <왜 성경적 상담인가?< (손경환 저, 이요나 편역, 미션월드 출판)


출처 성경적상담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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