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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25
제목 성경적 신학과 내적치유

성경적 신학과 내적치유

 

서론

미국 어느 신문에서 어떤 젊은 여자가 10년간 자기 아버지에 의해 창녀로 팔렸다가 구출 됐다는 이야기를 읽은 일이 있다. 참으로 끔찍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고간에 고통을 당하면서 산다. 신약성경 27권 중에도 고통과 어려움과 시련과 유혹과 갈등의 이야기가 없는 곳이 없다. 신약성경 중에 어느 하나도 진공 속에서 기록 된 것은 없다. 모두가 인간의 삶을 소재로 기록했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어려움과 죄와 유혹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2장에 와서야 모든 악과 고난과 죽음과 죄 등의 기록이 끝난 것을 본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긴다. 그런데 주님도 사람들과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다. 그는 죄가 없으셨으나 하나님께 순종하고 고난을 당하시면서 십자가까지 지셨다. 이것은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 .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기”(5:9) 위해서였다.

 

성경에서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나 희생자(피해자)로 묘사하지 않았다. 또 근본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자로 묘사하지도 않았다. 성경은 인간의 목적을 모태부터의 희생자(피해자)로 묘사하고 있지도 않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존재로 기록하고 있다.

 

1. 주님은 우리의 본이시다

 

성경은 인간을 책임이 있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이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받지만 인간은 무엇이냐가 문제점(issue)이다. 인간은 죄인이냐 의인이냐가 문제점이고, 우리가 소망을 무엇에 두느냐,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느냐 아니면 물질에 두느냐,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아니면 쾨락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느냐가 문제점이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의 전형(paradigm)이 되신다. 이는 주님께서 자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십자가까지 지셨다. 십자가를 지신 것은 능동적으로 또 자진해서 지신 것이다. 인류를 구원할 목적을 가지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하시면서 자진해서 죽으신 것이다. 고로 예수님은 희생자(피해자)로 자기를 우리와 동일시하지 않으신다. 십자가는 희생(피해)의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주된 의미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53:5를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심각한 질문을 주는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아니면 나를 사랑하느냐? 또 우리는 누구를 의뢰하느냐? 하나님이냐 아니면 모래 위에 우상으로 세운 자신을 사랑하고 의뢰하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냐? 하나님의 사람이냐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한 사람이냐? 나는 반석이신 예수님을 피난처로 삼고 사느냐. 아니면 무엇이 나의 피난처이냐. 이것들은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고통과 관련해서 근본적으로 알아야 할 질문들이다. 이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실 질문은: “네가 어떤 일을 당하고 살다 왔느냐?” “너에게 있었든 그 나쁜 일들에 대해서 나에게 말을 해 보라가 아니라 우리에게 하실 질문은 너는 네가 당한 일에 대해 무엇을 했느냐? 네가 누구를 섬겼느냐? 네가 어려운 일을 당한 것을 내가 안다 그러나 네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했고 누구를 섬겼느냐라고 하실 것이다.

 

2. 성경의 핵심적 내용

 

성경에서는 왜보다 무엇이 더 중요하다. 무엇 즉 고통은 성경의 내용(context)이다. 이 내용(context)에서 하나님의 의와 영광이 나타나고 우리의 믿음이 나타난다. 그래서 욥기에서도 욥의 고통이 주가 된 것이 아니다. 욥이 모든 것을 잃었어도 욥의 끝은 완전히 다르다: “내가 회개하나이다.” “전에는 귀로만 들었더니 이제는 내 눈으로 하나님을 뵈웠나이다.” 욥은 하나님을 알아왔다. 그러나 욥이 당한 고난이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가까이 알게 했다. 고난과 고통에는 언제나 더 큰 뜻이 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해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8-9)고 했다. 즉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뢰하라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인간의 삶에는 갖가지 어려움이 있다. 우리는 대인 관계에서 많은 갈등을 갖고 살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다. 즉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신다. 이것은 내가 누구를 섬기느냐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불신자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할 줄 안다.

 

따라서 고통은 목적이 있다: 1) 고통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시험이다(8:2). 고통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들어낸다. 우리가 누구를 섬기느냐를 들어낸다; 2) 또 고통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한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벧전 1:7). 고통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우리를 정금보다 귀하게 만드신다.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지를 알게 한다.

 

요점은 우리는 모두 고통을 당하지만 근본적으로 희생자(피해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죄인이다. 문제는 우리의 책임과 고통과의 관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적치유 운동의 정체를 들어내는 핵심적 문제점의 하나이다. 즉 인간의 책임과 인간의 고난과의 관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기독교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방법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 중에 큰 유행을 타고 있는 것이 심리이설의 내적치유이다.

 

3. 내적치유의 내용

 

내적치유에서는 인간은 모두 수동적이요 피해자라는 것이다.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모두 수동적으로 고통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모두 고통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요 파생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우리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기독교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하는 많은 상담이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 서점에서 판매하는 상담에 관한 책들의 몇 %가 이런 내용을 취급하고 있는지를 조사해 보아야 한다. 상담에 관한 책의 최소 80-90%가 이런 심리적 사상과 철학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들이다. 인간은 수동적으로 고통을 받고 죄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보상적으로 행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적치유의 내용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내적치유의 잘못을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정확히 알고 우리의 마음을 성경적으로 치료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계속)

 

4. 교회에 들어온 내적치유

 

내적치유에서는 죄는 상처를 받은 보상으로 하는 우리의 반응이라고 한다. 또 죄는 다른 사람이 나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한다. 여기서 필요라고 하는 것은 주로 사랑을 받는 것을 말한다. 내적치유의 운동과 통속 심리학(pop psychology)들은 이런 구조로 큰 (drum)”을 만들어 그것을 두들기며 큰 소리를 낸다. 여기에서 사용하는 기본적인 질문은: “왜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이다. 내적치유의 모든 체계가 이 질문에 따라 움직인다. 이것으로 내적치유의 동기를 유발하고 또 내적치유의 기본적 활력을 얻으려고 한다.

 

내적치유의 주된 문제점은 상처이지 가 아니라는 것이다. 죄는 상처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죄가 많고 비합리적이고 불완전한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성년이 될 때에는 이미 성격이 부분적으로 상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손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상처를 만져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맞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심리이설의 교활함과 미혹이 숨어있는 것이다. ? 이런 표면적인 말 자체에는 틀린 것이 없고 그것이 전적으로 사실인 것 같이 들리지만 바로 여기에 신학과 이론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왜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나에게 닥쳤던 일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나의 행동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우리가 고난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는 신학적으로 근본적인 오류를 들어내는 것이다.

 

내적치유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의 뿌리는 상처라는 것이다. 또 죄의 저변에는 꼭 상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적치유자들의 신학이요 논리이다. 우리가 악을 행하는 것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먼저 악을 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 미국 대통령 Jimmy Carter의 죽은 누이동생인 Ruth Carter Stapleton는 교회에 내적치유를 처음 도입한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은 깊은 내적 상처 때문에 부적합한 삶의 반응을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은 David Seamands가 교계에서는 내적치유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어 있다. 그의 저서 “Healing for Damaged Emotions”에는 내적치유의 심리이설의 신학이 가득 차있다.

 

내적치유는 현재 교회에 물결처럼 들어와 있는 통속 심리학(pop psychology)의 하나로서 이와 똑 같은 사상과 똑 같은 신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같은 기법을 쓰지 않고 또 같은 말을 쓰지는 않지만 그들의 근본적인 구조 즉 현실과 죄와 고난과 책임과 상한 내적 어린 아이 등을 보는 방법이 같으며 이것들이 바로 내적치유의 주제들이다.

 

5. 내적치유자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성경적상담을 한다고 해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의 사정을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여러 가지 사건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이런 괴로움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성경적상담은 이런 고통의 현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내적치유 운동이나 회복 운동 등에서는 고통과 책임을 둘러싼 신학적 구조가 문제가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들이 통속적인 Freud 주의이기 때문에 그 주제는 언제나 어릴 때의 경험, 충격, 갈등 등이라고 하며 그 책임이 다른 곳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인기를 끌고 또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말들이다.

 

Frank Minirth 등이 고저한 “Love is a Choice"에서도 전체 사상은 사랑의 탱크가 비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적치유와 똑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Larry Crabb“Unmet Yearnings for Love"도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우리의 깊은 곳에는 부모(혹은 주로 돌보는 사람-primary care giver)에게서 받은 좌절 때문에 그리움이 있다는 것이다. Crabb는 상처받은 내적 어린아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그의 기본 구조는 똑 같다. 부모(혹은 주로 돌보는 사람-Primary care giver)에게서 내가 상처를 받은 것이 나의 현재의 행동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6.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

 

기독교 서점에서 볼 수 있는 상담에 관한 대다수의 책들의 구조가 기본적으로 이와 똑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과 삶과 마음을 위한 영적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행동과 삶의 압력과의 관계, 좌와 고통과의 관계, 개인의 책임과 이런 것들과의 관계가 우리를 형성하고 움직이고 몰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관계를 내가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하며, 이것이 앞으로 내가 진리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서겠느냐 아니면 앞으로 교회를 휩쓸 다른 복음을 따름으로 저주를 받을 것인가(1:8-9)를 결정하게 된다.

 

자유주의의 전성기는 갔지만 보수주의가 계속 심리학화 되어 간다면 교회의 부흥의 바람을 그들에게서 기대하기는 힘들다. 보수주의가 진리의 깃발을 들고 주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서려면 고통책임의 문제를 정확히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보수주의가 고통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책임고통에 대해 잘못 답변을 하면 우리는 다른 복음을 만들어 심리이설의 바람을 일으키는 거짓된 보수주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싸움은 우리의 삶(practice)이다. 어떤 면으로는 이것이 더 큰 도전이다. 왜냐하면 내가 죄를 다루고 고난과 상처와 고통과 다른 사람들의 죄와 어려움과 고통을 다루는 방법이 모두 여기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적치유나 통속 심리학이 신학적으로 틀렸다고 지적할 뿐 아니라 그들의 오류까지도 지적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또 남에게서 피해를 받은 사람과 곤경에 빠진 사람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과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 이들을 내적치유와 통속 심리학과 세칭 회복운동(recovery movement)에서 구해낼 수 있어야 한다.

 

통속 심리학을 읽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이야기가 자기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거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자기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래 맞다, 내가 완전주의자이다,” “그래 내가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있다,” “그래 나는 초 민감한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이것들이 자기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느냐가 성경적상담자에게 닥친 큰 도전이다. 결국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릇된 것과,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잘못된 것에 관한 우리의 확신이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데 필요한 지혜와 온유함과 인내력과 부드러움이나 공감 등과 결부되어야 한다. 이러한 도전을 감당하려면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인내와 용기와 진리를 우리의 사역에 적용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런 주님의 성품과 사랑과 마음만이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을 믿고, 또 성경은 이런 문제를 다루어 생명과 경건에 이르도록 하는데 충분함을 우리는 확신해야 한다. (계속)

 

7. 내적치유의 기법

 

나는 지금까지 무시를 당하고 살았어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무시를 당했고 또 남편도 나를 버렸어요하는 말들을 들으면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주느냐?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큰 도전이다. 이런 도전을 감당하려면 옳고 그릇된 것과 참되고 잘못된 것에 관한 확신을 가지고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역하는데 지혜와 온유함과 인내력과 사랑과 동정심과 용기와 복음의 진리를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적치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분석해 내적치유의 기본적 역동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보통 사람이면 15분 내지 20분이면 내적치유의 간단한 기본적 기법을 배울 수 있다.

 

내적치유는 피상담자의 상처와 충격 즉 상한 정서들을 치료한다고 하면서 대개 피상담자의 삶의 주된 보호자(primary care giver)인 그의 엄마에게서부터 시작한다. 어디서 긴장과 상처가 시작됐는지, 어디서 피상담자가 거절을 당했는지, 또 아버지는 어땠는지, 오빠나 언니나 동생은 어땠는지, 학교 친구는 어땠는지, 학교 분위기는 어땠는지를 조사하며, 또 어려서 살든 곳을 상상해보게 한다.

 

 어려서 4-5세 때 살던 xx 동네는 어땠는지? 무엇을 기억할 수 있는지?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었는지? 그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기억이 나는지? 동네 애들과 아빠 엄마 하면서 소꿉질하던 일을 기억해보게 한다. 그 때 조금 부끄러워하지는 않았는지? 그 후 몇 년 동안 초등학교에 가기 전후해서 살던 xx동네에서는 어땠는지? 무슨 수치를 당한 일은 없었는지? 죄 책을 가졌던 일은 없었는지?

 

학교에 다닐 때 급해서 오줌을 쌌거나 오줌을 옷에 지려 애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수치나 거절 등을 당한 일은 없었는지? 이런 일을 기억해보라고 한다. 초등학교 때에 아버지는 직장에서 출장을 많이 다니셨고 나는 새 학교로 전학을 했을 때 새 학교에서 상처나 괴로웠던 일은 없었는지 더듬어 보게 한다.

 

이것은 자료 수집이나 심리분석의 자유연상과도 흡사하다. 생각을 더듬어 보면서 긴장이 있었던 곳을 찾는다. 자존심이 낮았던 곳도 찾는다. 교파에 따라서는 내적치유를 할 때 지식의 말씀을 적용시키려고도 한다. 내적치유에 성령의 은사를 적용한다는 것이다: “지금 주님은 당신에게 상한 정서가 있다고 하십니다등의 말을 하기도 하고 내가 당신의 사정과 마음을 안다는 식의 말도 한다.

 

 즉 그는 피상담자의 상한 정서와 접촉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진단을 하면서 누가 피상담자에게 상처를 주었나를 찾는다는 것이다. 피상담자가 상처를 받고 거절을 당한 사건으로 돌아가 거기서 받은 상한 정서를 찾는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내적치유에서는 피상담자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세운다. 이 경우에는 보통 예수그리스도를 세운다. 이때 피상담자의 나이는 6세였다고 가정한다. 그가 눈을 감고 상상하게 한다. 그 때 그의 아버지는 엄마와 이혼을 하고 차를 타고 가버린다. 피상담자는 방에서 창문 밖으로 이것을 내다본다. 그 때 무섭고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럽고 무슨 영문인지 혼돈 되었던 것을 기억해보게 한다.

 

이럴 때 내적치유자는 이렇게 말을 한다. “지금 예수님이 방에 들어와 당신을 품에 안아주신다. 그리고 당신에게 말씀해주신다: 이제 아무 일도 염려하지 말라. 너의 아버지는 너를 버렸으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 아버지는 너를 무가치하게 보았지만 나는 너를 귀하게 본다. 너는 나에게 매우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매우 귀하다.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해 죽지 않았느냐?” 이런 칭찬과 격려의 말과 새로운 자존심을 주는 말로 피상담자에게 유도심상을 시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새로운 역할 대행자가 생겼다고 한다.

 

피상담자가 천주교인인 경우에는 마리아가 역할을 대행할 수 있게 한다. 또 기독교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경우에는 피상담자 자신을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하게도 한다. 조용한 해변가에 앉아서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상상하게 한다. 정신과 정서를 바꾸면서 유도 심상을 해보게 한다. 이런 기법들은 내적치유자의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기억이 정말 바뀐다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정말 그곳에 오신다는 사람도 있으나 그 핵심은 모두 같다

 

이제 피상담자를 사랑하고 그의 자존심을 높여주고 그를 확인시켜주며 무조건적인 긍정적 관심을 주며 또 정서적 카타르시스(catharsis)도 하게 하는 이런 치료 때문에 피상담자는 자유로워지고 세상에 대해 새롭게 반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적치유가 성경적 구조를 가지려면 첫째로 마음(heart)이 무엇이냐와 둘 째로 복음 즉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냐에 대해 성경적으로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내적치유에서는 마음을 기억과 상처의 창고라고 한다. 기억은 부정적 기억으로 상처를 받은 것을 말한다. 모든 죄는 배후에 상처와 아픔이 채워지지 않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채워지지 않은 욕구 즉 사랑이 채워지지 않은 아픔을 저장하는 곳이라고 한다. 이런 사랑의 욕구는 내적치유 운동에서 다르고 있는 대 주제이다.

 

8. 내적치유는 거짓된 다른 복음이다

 

두 번째 질문은 복음 즉 하나님의 사랑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사람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 예수를 원하는 대로 만든다.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이 건강과 돈이라고 하면 당신을 부자로 만들 수 있는 예수를 만든다는 것이다.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조건적인 긍정적 사랑과 배려와 완전한 수용이라면 그리고 나의 욕구가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고 인정해주고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이면 당신은 Carl Rogers를 닮은 예수를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기본적으로 통속 심리학에서 하는 것들이다. 예수를 우주적인 Carl Rogers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성경적인 구조가 없다: 회개와 십자가의 구조가 없다. 우리의 죄를 지시고 돌아가시고 나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의 사랑의 구조도 없다. 복음을 무조건적인 수용의 기초로만 사용한다. 죄나 쓴 마음 등은 상관하지 말고 기본적으로 있는 그대로 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죄는 단지 반응적인 것이기 때문에 당신의 본성은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참된 당신은 상처받은 당신, 가치 있는 당신, 사랑받았어야 할 당신, 무조건적으로 긍정적 수용을 받아야 할 당신이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그대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면으로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비슷하게 들리기 때문에 미혹되기 쉽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의 복음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지 않는다. 나를 받아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것을 내가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시는 것이다. 혹 자기들도 이런 것을 믿는다고 하는 경우가 있으나 복음은 무조건적인 수용의 기초는 아니다.

 

참 복음은 내가 죄인이라도 무조건 받아주는 것이 아니다. 참된 복음은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을 통해 내가 그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때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받아주시는 것이다. 이는 내적치유자들이 말하는 복음과는 전혀 다른 복음이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이나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다른 거짓된 복음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1:8-9). 또 우리의 마음은 수동적이 아니고 능동적이며 우리는 근본적으로 피해자(victim)가 아니고 행동자(actor)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9. 내적치유의 잘못된 전제

 

교회는 내적치유가 심리학자 Carl Gustav Jung에게서 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전에는 심리학과 정신과학과 새시대(New Age) 사람들만 하던 내적치유가 그의 제자 Agnes SanfordRuth Carter Stapleton과 또 이들의 제자 John and Paula Sanford, Dennis and Rita Bennett, Michael Scanlan들을 통해 기독교회에도 들어오게 된 것도 알아야 한다.

 

교회에 들어온 내적치유는 그의 기법인 퇴행(regression)”, 심상법(visualization), 유도 심상법(guided imagery), 꿈의 분석과 게슈탈트(gestalt: 원시적 비명, 감정의 표출, 역할 대행 등)와 같은 기법(또 많지만)의 하나 혹은 전부를 사용하면서 이것들을 성경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했다.

 

인간의 영혼을 돌보는 사역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건전한 정서를 갖기 원하시며, 분이나 시기 질투와 같은 파괴적인 정서는 이를 버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맺기 원하신다. 그래서 참다운 내적치유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개개인의 형편에 맞게 행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이다.

 

심리학과 교회 안에 들어오고 있는 내적치유는 성경에서 말하는 상담이나 권고나 권면이나 훈계 등의 성경적 사역과는 다르다 (간혹 성경적으로 상담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역을 내적 사역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정서적 건강과 영적 건강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서적 건강은 성화의 과정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마음에 믿고 영접하는 결과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영을 다시 살게 하시는 결과로 성화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적 치유가 필요 없고 계속 삶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바로잡아 변화를 받고 평생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의로 교육하면(성화되어 가면) 된다.

 

불신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그를 구주로 영접해야만 영적인 생명과 영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교회가 이것을 분명히 해주어야 한다. 심리적 기법은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도 영적인 생명을 줄 수 없다. 따라서 내적치유란 말은 성경적 상담이나 신앙생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순수한 심리이설이다.

 

내적치유의 기본적 전제는 사람들은 누구나 살면서 부정적인 경험을 하기 때문에 정서적 상처를 받으며, 뿌리가 깊고 식별하기 힘든 상처는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이성이 발달하는 6세 까지 사이에 받는 상처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처는 무의식 세계에 숨어 있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특별한 이유 없이 자기가 원치 않은 행동을 하고 느낌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정신적 결정론이라고 한다. 이는 일종의 운명론이다.

 

내적치유는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자기에게 심리적 상처를 준 그 순간들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는 것이다. 어떤 내적치유자들은 전생까지 기억을 더듬어 전생에 받았던 상처까지도 다룬다고 주장한다. 이런 고통을 완화시키기고 치유를 하기 위해 환자들에게 퇴행(regression)”과 심상법(visualization)과 유도 심상법(guided imagery) 등의 기법을 사용하며 또 이것을 혼자 해 보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내적치유자들은 사람이 겉으로는 정서문제를 들어내지 않아도 또 상처를 받은 것을 생각해 내지 못해도 사람은 누구나 내적치유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한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누구나 상처를 받는데 심한 경우에는 아동학대를 받기도 하고 또 자기도 모르는 난산의 고통 때문에 상처를 받는 등의 불쾌한 경험을 하고 살기 때문에 항상 끊임없이 내적치유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적치유를 한다는 기독교인들은 내적치유로 성령님과 예수님을 돕는다고 한다. 내적치유는 성령님이 역사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얼마나 잘못된 말인가? 첫째로 성령님은 심리적 기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이나 그의 제자들이나 또 구약의 선지자들이 인간의 심리적 구성을 알고 있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그 분들이 내적치유 같은 임상심리학의 기법을 사용한 증거는 전혀 없다. 둘째로 내적치유는 성령님의 임재에서 오는 능력을 사람의 육신적 상상으로 얻는 인간의 힘으로 대치하려고 한다. 성경은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분명히 말씀했다.

 

10.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

 

셋째로 오늘날 많은 기독교 내적치유자들이나 교인들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목적을 이루고 우리의 욕구를 채워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생각한다. 물질이 필요하면 물질을 채워지시고 건강이 필요하면 건강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도 충실히 나가고 성경도 매일 보고 기도도 매일 하는데 왜 나의 욕구를 채워주지 않느냐는 불평도 한다.

 

 예수님을 나를 위해서 이용할 수 있는 분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물질이나 건강도 필요하다. 그리고 또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것들을 채워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목적이 성령님께 쓰임 받기 위해 이 세상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고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상한 심령으로 겸손하게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 대신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기 욕심만 갖게 되고 하나님 대신 자기를 삶의 초점으로 삼게된다.

 

기독교 내적치유자들은 교회에서 내적치유를 하게 되면 성령님과 예수님을 촉매 역할을 하는 상담자로 만들기 때문에 치료가 가능해진다고 하며 내적치유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우리 속의 참된 평강은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게 드릴 때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일이 있던지 하나님께서 완전히 나를 주장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속에 충만해지게 된다.

 

또 기독교 내적치유자들이 내적 치유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다른 이유는 사람들이 용서를 못하는 이유가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내적치유는 환자들에게 자기가 과거에 받은 상처를 다시 경험하게 해서 환자로 하여금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기를 임신 중에 아버지와 다투어서 내가 상처를 받았으니 그 어머니를 용서해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에게도 잘못이 있다면 하나님도 용서해야 한다고 한다.

 

용서가 정서적 건강에 꼭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기독교 내적치유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도 하나님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기분을 돋구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용서하는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고 또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이러한 사랑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주장하실 때에만 가능하다.

 

11. 내적치유자들의 변명

 

이들은 내적치유를 받게 되면 하나님과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성경도 더 많이 읽고 싶어지기 때문에 내적치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내적치유를 받는 사람이 이러한 기분이 생기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기분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알리는 표식판이 될 수 없다. 많은 이단자들과 새시대 종파 사람들이 기독교인들 보다 성경을 얼마나 더 열심히 읽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느낌만 가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종교적 망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의식 상태를 변화시키는 영적인 연습만을 해도 경험할 수 있다. 이단자들도 자기들의 생각으로 만든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에 대해 간절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묵상을 끝낸 동방 신비주의자들의 얼굴을 보면 기쁨이 충만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충만해 있는가? 사실 새시대(New Age)의 철학의 전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으로 완전한 통일과 조화를 이룬다고 믿는다. 내적치유자들은 내적치유의 방법으로 인류를 자연 및 우주의 마음(Universal Mind)”과 통합시키고 조화시키며 성경의 방법을 그것으로 대치해서 성도들을 성화시키려고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님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히 심리이설이요 사탄의 역사임을 경계해야 한다. (계속)

 

12. 과거는 상담자의 문제이다

 

과거에 경험한 인간의 기억을 치료한다는 내적치유는 심리적인 기법으로 부정적인 인간의 정서를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한다. 내적치유는 주로 인간의 과거와 관계가 있거나 과거 때문에 생기는 죄책, , 두려움, 자기를 미워하거나 남을 미워하는 것, 질투, 낮은 자신감이나 자존심 등의 부정적인 정서를 다룬다고 한다. 고로 과거의 기억을 치료하는 것과 관련된 과거에 대한 성경적 견해와 심리적 견해를 간단히 비교해 보고자 한다.

 

과거는 상담 문제이다. 상담자는 누구나 피상담자의 과거를 다루게 된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항상 자기의 과거를 직면하게 된다. 결혼 생활의 문제로 상담을 받던 부부가 있었다. 두 사람이 다 신자였다. 그런데 세 번째 상담 모임에서 여자의 과거가 들어 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그의 삼촌에게 성적으로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이 나타난 것이다. 이럴 때 상담자는 즉시 이 사건이 현재 남편과의 문제와 관계가 있을까하고 생각한다. “만일 관계가 있다면 어느 정도일까?” “또 그것을 다루려면 어떻게 다룰까등을 생각하게 된다.

 

또 결혼생활 중 남편이 간음을 했던 부부가 있었다. 이 부부는 모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철저히 회개를 했다. 부인은 성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용서가 1) 상대에게 그 말을 다시 하지 않는다는 약속인 것을 잘 알고 있었고, 2) 또 용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인 것도 잘 알고 있었으며, 3) 또 용서는 자신도 그것을 다시 생각하지 않겠다는 다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상담할 때마다 그 여자는 그것을 이야기했다.

 

그것도 아주 힘을 주어 강조했다. 이 때 상담자는 저 여자는 믿음도 좋은데 왜 저렇게 그것을 재론할까? 가르침이 부족한가? 아니면 훈계가 부족한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다른 과거의 문제는 없을까? 이 문제 때문에 현재의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또 한 여자는 불안때문에 상담을 받고 있었는데 그는 상담 중 저는 네 살 때 친족에게 성적 피해를 받은 기억이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flashback)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도 그런 일이 또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될까 하고 상담자는 생각한다.

 

이런 것은 상담자가 당면하는 과거에 관한 질문들이다. 그래서 과거는 상담의 문제이므로 상담자는 이런 과거의 문제를 다룰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다루는 방법은 여기서는 뒤로 미루기로 한다.

 

13. 과거는 문화적인 문제이다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문화의 문제로서 대단히 유행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과거에서 얻으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과거는 이제 당당한 삶의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과거의 문제와 과거 때문에 피해를 보았다(victimization)는 주장은 TV Oprah 프로그램 등에서도 열을 올려 많은 관중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과거의 사건들이 현재의 행동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며 또 그렇게 믿고 있다. 역기능 가족에 관한 문헌을 보면 미국 내의 가족 중 96%가 역기능 가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틀린 말이다. ?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사실은 미국 내 가족의 100%가 역기능이라고 해야 맞는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에 역기능을 하지 않는 가족은 없다. 결혼을 해서 자녀가 있으면 그 자녀들은 누구나 역기능가족에서 성장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고 구원은 받았으나 아직도 틀림없는 죄인이다. 죄인이면 그 죄가 가족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자녀를 키우든지 그 자녀들은 부모에 대해서 불평을 하고 책임을 전가하게 마련이다.

 

과거가 현재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피해자(victims)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의 기분을 돋구어 주는 말이다. ? 삶의 문제에 대한 나의 책임을 면제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하던지 그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가족이 역기능을 했기 때문에 나의 부모가 나의 삶에 필요한 힘을 주지 못해 내가 나를 실현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 문화에서는 나의 현재의 문제는 그 이유가 전부 과거 때문이라는 것이 지배적이다. 부모도 형제도 심지어는 목사도 모두 불완전했으니 나에게 이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적치유를 한다는 것이다.

 

14. 우리의 출발점이 하나님이냐 아니면 문제이냐가 중요하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과거에 관한 이론을 믿고 우리의 문제 속으로 하나님을 잘못 도입하는 것은 매우 경계할 문제이다. J. I. Packer“Knowing God"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오늘 날 사람들이 하나님도 인간과 같이 인격적이라는 말을 강조하다 보니 하나님도 우리와 같이 약하고 적합치 않고 비효과적이며 어딘가 부족하게 보인다는 인상을 준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의 역기능적 배경대로 하나님을 우리와 같은 인간의 수준으로 낮추어보면서 하나님도 결국 그렇게 대단한 분이 아니군요. 이런 일이 나에게 닥칠 때 하나님은 어데 있었습니까? 만일 당신이 하나님이면 그 때 왜 모른 척 하고 계셨습니까? 당신도 우리와 같이 약하고 별 힘이 없으시군요?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며 나를 도와주고 나의 기분을 좋게 해주며 사람들이 나에게 준 상처를 고쳐준다고 하십니까?” 하며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우리가 우리의 경험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에게로 가면 언제나 하나님을 왜곡하게 마련이다. 물론 우리의 경험을 하나님에게 가지고 가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도 하나님에게 가지고 가야 한다. 성경에서도 이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보려고 하면 하나님을 왜곡하게 된다. 이것은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과거의 문제든 현재의 문제든 우리의 경험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에게로 가지 말고 먼저 하나님에게서 출발해 우리의 경험으로 가면서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먼저 정의해 놓고 그것을 현재의 나의 삶에 적용하라고 가르친다.

 

15. “피해자(victimization)"의 문화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문화는 곧 피해자(victimization)"의 문화를 반사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냉장고를 등에 지고 가는 경주에 참가했다. 그런데 그가 경주에 참가했다가 허리를 다쳤다. 당연히 허리를 다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냉장고 제작회사를 고소했다. 고소 내용은 이것을 등에 지고 가면 허리를 다칠 수 있다는 경고문을 냉장고에 부치지 않아 내가 허리를 다쳤다는 것이었다.

 

한 정부 직원이 공금으로 도박을 했다가 실직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나는 도박을 하는 중독() 때문에 도박을 했는데 해직은 부당하다고 정부를 상대로 고소를 했다. 그는 승소를 하고 다시 그 직장을 찾았다. 어느 학교 선생은 항상 학교에 늦는다는 이유로 해직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나는 강박적 지각 증상(compulsive lateness syndrome)이 있다고 하면서 교육청을 상대로 고소를 했다. 물론 그도 승소했다. 우리는 지금 피해자(victims)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이제는 무엇에나 자기의 책임을 전가시킬 수 있게 되었다. 애들이 자기의 방을 정돈하지 못하는 것도 피해자이기 때문이고, 아내가 쇼핑(shopping)을 너무 많이 하는 것도 강박적 쇼핑 장애(compulsive shopping disorder) 때문이고, 심지어는 내가 살인을 한 것도 나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예는 부지기수이다. 이제는 무엇이나 그것의 피해자로 만들면 된다. 이것이 내적치유가 갖다준 문화이다. 내적치유자들은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죄와 책임의 개념은 뒤로 제쳐놓고 고통과 피해(victims)의 개념을 앞자리에 모셔놓고 있다. 이것이 내적치유의 비성경적 문화요 다른 거짓된 복음이다.

 

 

16. 과거는 심리치료의 문제이다

 

우리는 과거와 그의 영향에 대해서 심리이설자들이 말하는 세 가지 중요한 정신역학의 이론을 알아야 한다. 첫 째는 인간에 대한 Freud의 수력학적(hydraulic) 견해이다. 전통적인 심리분석은 인간을 정서적 에너지가 가득 찬 뚜껑이 닫힌 용기와도 같다고 한다. 사람 속에 있는 이런 에너지는 수력학적 액체와 같이 절대로 소멸되지도 않으며 밖으로 새어 나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곳에 압력을 가하면 그 에너지는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가하는 압력의 희생자나 피해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Freud결정론의 원색적이고 기초적인 이론이다.

 

두 번째는 무의식의 개념이다. 무의식이란 말은 우리가 기억을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기억 못하는 것들이 많다. 어떤 것은 평생 기억 못하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심리분석에서 말하는 무의식이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억압된 기억과 충동의 원시적 늪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훈련받은 분석가가 아니면 탐색해서 꺼내낼 수 없는 깊은 늪이라는 것이다. 이런 무의식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세 번째는 카타르시스(catharsis-정화법)의 개념이다. 의식할 수 없는 에너지와 정서는 배설해서 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네 살 때 나의 부모에 대해서 분을 가졌었다면 그 분은 아직도 내 속에 있어 다른 방법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40세가 된 지금 내가 그 분을 다루려면 지금이라도 그것을 배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로 상담이란 피상담자에게 자신의 정서를 배설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배설하지 않았던 느낌을 배설해 정화하는 것을 카타르시스라 하며 이는 인간에 대한 수력학적 견해가 무의식의 개념과 합쳐져 삶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이론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어떤 연구도 이런 느낌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질 못한다. 학문적인 연구 결과를 보면 분과 공격성향을 많이 표하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많은 분을 내며 공격적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카타르시스는 분을 감소시키지 못한다. 이런 연구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이론은 과거에 대한 견해에 아직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17. 하나님과 과거

 

기독교 심리치료자들은 피상담자의 부정적 경험으로 상담의 주요 내용을 삼으려고 하지만 성경적상담에서는 과거에 대한 상담은 성경에서 시작하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분명히 과거가 현재나 미래를 결정하지는 않지만 많은 영향을 준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하나님은 심리치료와는 달리 시작을 성경에서 하라고 하시며 우리의 삶과 느낌과 생각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것들부터 기억하라고 하신다.

 

 10:32에서도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고 하셨다. 이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험했던 중요한 일들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기억하면 지금 내가 신실한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과거와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하신 대표적인 세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 째로 하나님은 너희는 출애굽과 유월절과 유월절의 기념물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성경에는 이런 기념물이 많다. 또 애굽에서 나올 때는 쓴 나물을 먹고 (1:14) 그들의 괴롭던 생활과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자기가 베푸신 은혜를 그의 백성들이 잊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래서 그것들을 상세하게 기억하라고 하셨다.

 

둘 째로 주님은 주의 만찬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즉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며 그의 재림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주님의 만찬은 우리의 기념물이다(22:19). 셋 째로 고전 10:1-13에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의 어리석음을 기억해 교훈을 받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하셨다. 이는 과거는 언제나 현재에게 교훈과 권면을 준다는 말씀이다.

 

과거의 기억은 그 해석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그래서 해석은 과거를 이해하는 방법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또 하나님이 기억하라고 하신 과거의 사건들은 현재까지 연결되어 있다. 기억은 단순히 향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과거는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사는 현재의 우리의 삶을 위한 것이 돼야 한다.

 

18. 사람과 과거

 

죄는 역사가 있다. 거룩함과 좋은 은사도 역사가 있다. 과거는 현재나 미래를 결정하지는 않지만 무수한 방법으로 현재에 영향을 준다. 상담자에게 와서 도움을 청하는 피상담자는 어제나 오늘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그도 역사가 있고 삶의 내용을 갖고 있다. 누구나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려서 된다. 음성이 크고 거칠고 자기주장을 많이 하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질 않는다. 오랜 세월동안 배운 습관의 결과이다. 만족하며 사는 사람도 오랫동안 만족하며 사는 습관을 배운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삶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가 있다. 각자의 이야기는 모두 독특하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각자의 삶 속에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야기를 써주신다는 말씀이다.

 

모세의 생을 보면 하나님은 그를 애굽에서 40, 광야에서 40년을 준비시키셨다. 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세월이 필요했다. 요셉이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또 그의 꿈 이야기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 형무소 생활을 했지만 후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양식을 구하러 온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꿨다) . . .”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그의 역사를 쓰신 것을 믿었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이 파란곡절이 많았던 그의 삶의 이야기를 쓰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과거를 경험했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을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그의 뜻을 이루시고 우리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기 위해서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과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하신 명령 때문에도 중요하지만 또 과거는 우리의 삶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19. 인간의 기억은 능동적이고 선택적이고 창조적이다

 

심리이설과 내적치유의 또 하나의 잘못된 이론을 알려면 과거에 대한 세 가지 성경적 견해를 알아야 한다. 첫 째로 기억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다. 사람은 기억하는 것을 선택해서 한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기억하라고 명령하신 것들이 있다. 예수님도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네게 말한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명령하신 이유는 기억은 능동적이며 선택적임을 뜻한다.

 

기억은 내적치유에서 말하듯 녹음장치를 틀어놓고 모든 것을 자동적으로 기록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들은 무엇을 기억할까를 선택해서 그것만을 기억한다. 또 기억은 창조적이다. 사람들은 기억하면서 내가 강조할 것을 변경하고, 순서를 바꾸기도 하고, 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내용은 삭제하기도 하고, 없던 새 내용을 만들어 넣기도 한다. 사람들은 원하는 데로 기억을 창조하기도 한다. 11:4-6, 16:1-22, 1:18의 말씀들이 기억의 능동적인 것과 선택적인 것과 창조적인 것들을 잘 설명한다.

 

20. 과거는 심리치료의 문제이다

 

현재 나에게 삶의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도 역사가 있다. 과거가 어떻게 현재에 나타나는가를 성경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것은 바울이 말한 구습을 좇는 옛 사람”(4:22)이라는 말이다. 옛 사람은 복음 앞에서는 점진적으로 없어지지만 옛 사람은 우리의 사는 방식 즉 생활방식을 말한다. 이 옛 사람은 믿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과, 하는 일과 원하는 것이 썩여있는 옛 사람이다(4:17-19, 22). 피상담자가 상담할 때 갖고 오는 오늘의 문제는 오늘 처음 나타난 문제가 아니다. 생활방식은 꾸며서 만들어지고 연습하고 세월이 지나면서 개발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성인을 볼 때 그를 과거에 있었던 모든 나쁜 것의 산물로만 보아서는 않된다. 그렇다고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완전히 나쁘고 악한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좌절된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좋은 일이 있섰을지도 모른다. 또는 그의 옛 사람은 아직도 죄성으로 차 있을지도 모른다.

 

옛사람은 인간의 마음이 창조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인간이 지금 살고 있는 삶은 삶이 무엇이냐에 대한 그의 결론 즉 그가 생각하는 믿음과 그의 가치관과 그의 요구와 그의 두려움과 그의 소망과 그의 사랑 등의 총화이다. 그가 변하는 것은 하나님은 삶을 변화시키는 것을 전문으로 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의 옛사람에게 무엇이 생겼느냐를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변화될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과거의 끔직한 사건과 현재의 사건이 창조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마음과 혼은 활동적이고 창조적이기 때문에 기억도 활동적이고 창조적이다. 나뿐 것이나 좋은 것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또 사람이 말을 만들어 내거나 나쁜 것들이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적으로 보아서 사람은 창조적으로 사건들을 창조하고 해석하고 그에 대해서 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해석은 둘 중의 하나이다. 신령하게 해석을 하든지 아니면 거짓말을 한다. 만일 거짓말이라면 소망이 있는 것이 그 거짓말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간혹 자녀에게 끔직한 일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핵심이 아니다. 열쇠는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어떻게 반응을 하고 어떻게 그것을 해석하느냐는 것이다.

 

과거는 피상담자의 옛사람을 들어내는 한 방법이다. 4:22옛사람은 헬라어로 [anastrophe]라는 말로 다시 돌아간다는 말이다. 정신적 혹은 행동의 패턴으로 계속 돌아가는 삶의 습관을 말한다. 죄는 전체 인간에게 영향을 주며 습관적인 내적 및 외적 생활 패턴을 만든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도 새로운 습관과, 새로운 삶의 스타일, 새로운 믿음, 새로운 태도, 새로운 생각, 새로운 욕구 새로운 행동을 만든다. 요약하면 [anastrophe]는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한다. 그의 가치관, 그의 생각, 그의 애정, 그의 행동 등의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

 

상담자가 상담을 하려면 피상담자의 모든 삶의 습관을 알아야 한다. 상담자가 피상담자의 과거에 대해서 물을 때에는 그의 [anastrophe], 즉 그의 삶의 습관을 들어내려고 묻는 것이다. 그가 삶의 사건들을 처리한 과정, 그의 가치관, 그의 생각의 패턴, 그의 행동, 그가 범한 죄들과 삶 전체를 들어낸다. 고로 회개는 현재 그가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지금까지 그가 살아왔던 잘못된 삶의 결론과 삶의 습관 전체에 대한 회개를 말한다.

 

21. 삶의 방법(mannter of life)

 

사람의 과거를 이해하게 되면 그에 현재에 대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목적의 중요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 과거는 현재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의 과거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를 알게 되면 그 사람에 관한 많은 중요한 것들을 우리는 또 이해할 수 있다. 기억은 능동적이고 선택적이고 창조적이기 때문에 사람의 과거는 현재에게 영향을 준다.

 

그러면 과거에 대해 성경이 갖는 상담상의 함축된 뜻을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가장 중요하게 적용되는 삶의 방법(manner of life)을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 Jay Adams 목사는 문제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과거가 어떻게 현재에 나타나는가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엡 4:22에서 언급된 삶의 방법(manner of life)에 잘 나타나있다. 이 삶의 방법이 바로 옛 사람의 특징이다. 이런 삶의 방법은 그의 부패된 믿음과 생각과 행동을 말한다. 사람들이 상담을 받으러 올 때 그들의 문제는 오늘 처음 나타난 것은 거의 없다. 삶의 패턴이란 과거 몇 년 동안 만들어지고 발전되어 온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의 모든 사람을 그들의 과거에 있었던 모든 나쁜 것들의 산물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과거에 나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아주 부패하고 악한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좌절된 일이 별로 없었고 좋은 일만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삶의 방법은 아직도 죄성일 수 있다. 삶의 방법이란 인간의 마음의 창조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지금 살고 있는 그의 삶은 그의 믿음과 그의 가치관과 그의 욕구와 그의 두려움과 그의 소망과 그의 사랑의 총화인 것이다. 만일 그의 결론이 죄성으로 된 나쁜 것이면 그에게는 소망이 있다. ? 그는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삶의 방법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의 과거를 생각하기 시작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그를 변화시켜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이런 방법은 사람이 끔직한 경험을 했을 때나 좋은 경험을 했을 때나 관계없이 할 수 있는 창조적이고 진취적이고 독단적인 상호작용이다. 인간의 마음과 영혼이 능동적이고 창조적이기 때문에 기억도 능동적이고 창조적이다. 그렇다고 나쁜 일이나 좋은 일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또 그가 말을 꾸미거나 나쁜 일이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부인한다는 말도 아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사람은 이런 일을 창조적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그 해석은 신령한 해석이 아니면 거짓 말이다. 만일 그것이 거짓 말이면 소망이 있는 것이 이에 대한 말씀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끔직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부모들이 자녀에게 끔직한 일들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초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점은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것이다. 그것에 어떻게 반응을 하느냐는 것이고 어떻게 그것을 해석하느냐는 것이다.

 

과거는 피상단자의 삶의 방법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4:17-24까지가 핵심구절이다. 삶의 방법이란 헬라어로 “anastrophe"로서 다시 돌아간다는 뜻이다. 바울은 우리가 계속 다시 돌아가는 것을 삶의 방법”mannter of life“이라고 했다. 우리는 무엇으로 계속 다시 돌아가는가? 무슨 갈망해서 계속 내가 돌아가고 있는가? 무슨 습관이나 무슨 행동패턴으로 내가 계속 돌아가고 있는가? 사람들은 일정한 생활 스타일이나 어떤 습관이나 일을 일정하게 하는 방식이나 일정한 가치관 등을 가지고 있다.

 

”anastrophe“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 누구는 수줍어한다등의 말을 한다. 즉 그 사람이 계속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말을 잘 하지도 않고, 조용히만 있는 생활 패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자기 주장만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고 또는 돈 걱정만 하는 사람도 있고 게으른 사람도 있고 열심히 일만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것들은 전부 삶의 방법(anastrophe)이다. 이런 삶의 방법은 우리의 습관적 패턴의 총화이다. 이것은 우리의 사고 방식(mindset)과 행동의 패턴이다.

 

죄는 전체 인간에게 영향을 주어 습관적인 생활 스타일인 삶의 방법을 안 밖으로 만들어 준다. 하나님의 은혜도 새로운 습관을 만들고 새로운 태도와 새로운 욕구와 새로운 행동을 만든다.

 

따라서 상담을 하려면 피상담자의 삶의 방법을 꼭 알아야 한다. 피상담자에게 그의 과거에 대해서 물을 때 상담자의 목적이 그의 역사를 들어내자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고 상담자의 목적은 그의 삶의 방법인 그의 “anastrophe”를 들어내고 그가 그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을 어떻게 처리했는가를 찾아내자는 것이다.

 

상담자는 피상담자의 기본적 가치관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말하는 마음(heart)이다. 그의 생각의 패턴을 알아야한다. 그의 행동을 알아야 한다. 즉 그가 빠졌던 죄를 알아야 한다. 그의 삶의 방법을 알려면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상담자가 피상담자의 과거를 탐색하는 것은 그의 이야기를 알려는 것이다.

 

상담자는 피상담자가 지금 하는 것이 어떻게 그의 삶의 방법에 일치하는 것을 알기 위해 그의 삶의 방법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회개란 그의 현재의 행동에 대한 회개뿐이 아니라 그의 잘못된 삶의 결론과 오랫동안 살면서 발달된 잘못된 그의 생활 스타일에 대한 회개라야 한다.

 

자료제공: 성경적상담자협회 www.biblicallife.kr 전화:(070)7565-3535

참조서적: 왜 성경적 상담인가?(손경환, 이요나 공저/ 미션월드 출판사)

 

출처 KA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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